명색이 냉면노래까지 만든 사람으로서, 진작에 냉면이야기 한 번 풀어놓았어야 마땅한 일이건만, 타르가 범퍼에 들러붙듯 추억이나 미련 따위의 끈적한 감정들이 젓가락에 들러붙어서 한 반년간은 냉면을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비로소, 서북면옥에서 슴슴한 국물을 들이키면서, 무언가 조금 끄적여보고픈 기분이 되었다.
평양냉면이야 워낙 매니아도 많고 인터넷에 글도 많아서 어느 집이 최고이니, 하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냉면집을 몇 군데 꼽아보련다.
1. 서북면옥
구의동, 어린이대공원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블루리본에도 선정된 집이지만 수수한 풍모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줄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지만, 요즘같은 계절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다.
맛은, 기본적으로 고기육수의 맛이다. 다른 집들과 비교하면 좀 더 솔직한 맛이랄까, 좀 더 투박한 맛이랄까, 고기육수에 털털한 메밀향이 함께 올라온다. 강남에 있는 우래옥처럼 느끼한 맛은 없다. 살얼음이 얼 정도로 국물을 차갑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육수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고기가 한 점 올라오는데 아주 담백한 맛이다. 가격도 7천원으로 참 착하다. 서울 시내에 이 가격에 평양냉면을 맛 볼 수 있는 집은 그리 흔치 않다. 주차는 바로 옆에 인접한 어린이대공원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주차비는 비싸지 않지만, 대공원이 붐비는 날씨 좋은 봄,가을 주말은 피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주차하느라 너무 배고파져서 2인분을 먹게 될 위험이 있다.
2. 남포면옥
무교동에 골목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된 한옥집을 개조해서 영업하고 있다. 겉보기보다 상당히 넓어서 한여름이 아니라면 기다리는 일은 많지 않지만, 인근에 직장인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만큼, 점심시간을 살짝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기는 흔치않은 동치미 국물을 쓰는 곳이다. 원래 평양냉면은 꿩고기로 맛을 낸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어서 국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꿩 대신 소를 쓰게 되었고, 위생문제로 동치미 국물은 잘 쓰지 않게 되었다고.
남포면옥을 들어서면 입구 오른쪽에 직접 담근 동치미 항아리들이 있다. 자리에 앉으면 동치미 국물이 먼저 나온다. 입맛에 따라 냉면에 동치미를 더 부을 수도 있다. 동치미가 들어가는만큼, 시원한 맛이 있고, 아미노산이 내는 감칠맛은 조금 덜 한 편이다. 대중적인 선호도는 고기육수만 쓰는 곳이 더 높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고유의 특징을 가진 이런 음식점이 꾸준히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면의 단단한 맛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쉽다.
저녁에는 수육이나 어복쟁반에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손님도 많다.
3. 방이동 봉피양
우래옥에 비하면 봉피양은 지점마다 맛의 차이가 크지 않고 관리가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방이점이 제일 맛이 좋은 것 같다. 벽제갈비가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저렴한 돼지갈비 체인인 봉피양을 만들면서, 우래옥에서 냉면을 만들던 주방장을 모셔와서 평양냉면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주방장이 현재 방이점에서 일하고 있다고 점포 내에 아주 크게 붙어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만드는 강남의 우래옥에 비해 균형잡힌 맛을 보여준다. 접해본 평양냉면 중에서는 최고의 대중성을 자랑하는 육수가 아닐까 싶다. 면위에 올려진 절인 무가 상당히 새콤해서 냉면의 심심함에 재미를 더해주지만, 초반에 많이 먹으면 국물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국물을 먼저 맛보고, 면을 먹어 본 뒤에 집어먹는 것이 좋다.
돼지갈비를 먹고 후식으로 냉면을 먹는 손님도 많지만, 느끼한 고기에 양념까지 발린 돼지갈비를 먹고나서 먹는 냉면은 니맛도 내맛도 아니지 싶다. 꽤 비싼 돼지갈비를 먹고도 양이 차지 않는다면, 차라리 찌게류를 시키는게 좋겠다.
얼마전에, 지인의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준 적이 있다. 원모어찬스의 '널생각해'라는 노래였는데,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네겐 늘 사랑이 설레임이니, 내게 사랑은 익숙함이야.' 익숙한 듯, 약간 심심하지만 질리지 않는 냉면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