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카드

2010. 3. 10. 23:43 from Metaphor

동네 놀이터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해가 질 때까지 뛰어다니던 때가 있었어. 드래곤볼 프리즘 카드 몇 장에 목숨을 거는 나날들이었지.
 말이 나온김에 좀 설명해보자면, 프리즘 카드란 빛에 반사되면 다양한 색을 발하는 스티커 형태로 된 카드로서, 다른 일반 카드와 10대 1에서 100대 1의 교환 가치를 가지는 스패셜한 것이었어. (그러고 보면 이 때 이미 우리는 물물교환, 교환가치 따위의 자본주의 개념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거지.)

 초사이어인 손오공같은 훈훈한 정의의 사도가 그려진 놈은 교환가치가 높았지만, 기뉴특전대같은 변태 캐릭터는 다섯 명이 한꺼번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일반 카드 10장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 힘들었어. 문방구에서 100원 주고 뽑은 봉투에 프리즘 카드가 들어있을때의 기분은, 소개팅에 내 취향에 맞는 아이가 나오는 거랑 비슷한 경험이랄까?


 아무튼, 그러고 놀던 어느날에 동네 놀이터에 솜사탕 아저씨가 찾아왔어. 허름한 옷차림에 얼굴은 거무튀튀한 것이 꼭 우리 중 하나를 유괴해 갈 것만 같았어. 게다가 앞니 하나는 금니 였단 말이지!
하지만 아저씨는 개나리 줄기 껍질로 풀피리를 기가막히게 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이 유괴범이거나, 적어도, 솜사탕에 독을 타는 흉악범일리는 없다고 확신했지.
 아무튼, 솜사탕이라는게 처음 봤을때는 엄청 신기하더라고. 구름같이 생긴게 색깔은 미술교과서 10색상환에선 본 적이없는 알록달록 파스텔톤이었거든. 대체 어떤 촉감, 어떤 맛일지 무지 궁금했어. 아직 단 맛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맛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달콤한 맛일거라고 막연한 상상만 할 수 있었지.
 하지만 바로 전날 엄마한테 받은 일주일치 용돈으로 전부 드래곤볼 카드를 사는 바람에 싸대기 좀 맞았기때문에, 내 힘으로 호기심을 풀 순 없었어.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도 항상 길은 있는 법이라. 당시 나와 함께 어울리던 놀이터 패밀리 중에는 집에 무려 패미콤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 님-이라 쓰고 싸가지라 읽지-이 계셨거든. 이 자식에게 마인부우 프리즘 카드 (일반 카드 30장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를 넘겨주고 핑크색 솜사탕 한 줌을 얻어먹을 수 있었어. 
 아, 근데, 그 맛이라는게, 참, 기대이하더라고, 단 거에 환장하던 그 시절에도 말야. 찬장 깊은 곳에 내 손이 닿지 않게 넣어둔 백설탕을 집어먹었을때나 별 차이가 없더란 말이지. 음, 차이가 있다면, 먹고나서 얻어맞느냐 맞지않느냐 정도?
 차라리 프리마가 더 깊이 있는 맛이라고 생각했던거 같아. 프리마의 경우, 엄마가 이거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엄청 겁을 줬기 때문에, 더 맛있었던거 같기도 해. 그때부터 금지된 것의 마력을 알고 있었던 거지.
 아무튼, 그렇다고 그 이후로 딱히 솜사탕을 안 얻어먹거나, 부르주아 님-이라 쓰고 싸가지라고 읽는-이 솜사탕을 즐겨먹는다는 이유로 앞으로 다시는 패미콤 하러 놀러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프리마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 일도 결코 생기지 않았어.
그리곤 언젠가, 놀이터에서 카드게임따위를 하거나, 게스나 GET USED따위의 청바지 대신 아동복을 입고 다니면 친구들과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생기던 시절부터, 나는 꿈이 솜사탕같은거라고 생각했던거 같아. 눈에 보이지만 잡으려고 다가가면 형체가 변해버리는 무엇. 끈적함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촉감만을 남기고 녹아버리는 그것. 손가락을 빨며 달콤함은 맛 볼 수 있지만, 그 형체 자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것.


 그런데, 이제 슬슬 '오빠'라는 호칭보다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빈도가 높아지는 연식이 되고 보니까, 꿈은 그런게 아닌거 같아. 프라모델을 할 때 자주 쓰는 재료중에 레진이라는게 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고3 때 좀 더 선견지명이 있었으면 이걸로 모형이나 만들고 있진 않았을텐데. 치과에서 이빨 떼울 때도 레진을 쓰거든.
아무튼, 두 개의 성분을 섞어서 모형을 만들게 되는데, 이게 처음엔 되게 말랑말랑하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거라. 이걸 이용해서 대략의 모양을 잡아놓고 어느정도 굳어지고 나면, 칼이나 사포같은걸로 깎아서 세부묘사를 하게 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색을 하고 나면 모형이 완성돼.
 새삼, 꿈이라는건, 이 레진이랑 비슷한거같아. 최초에는 정형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시간과 공을 들여 어루만질 수록 형태를 갖추며 서서히 굳어가는거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데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는거 같아. 처음엔 두리뭉실해도 괜찮아. 다만, 크기는 충분할 필요가 있지. 함선을 만들려면 함선의 1.2에서 1.5배 정도의 레진이 필요해. 깎여나가니까. 또 약간의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거든. 많이 확보하면 많이 확보할 수록 더 큰 놈을 만들 수 있지. 겪어보니까 그렇더라. 많이 모아놨는데 만들기가 힘들면, 확 깎아내 버리면 되. 근데 재료자체가 얼마 없으면, 만들 수 있는게 한정되거든. 빨리 만들 수는 있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당분간은 재료를 많이 모아두려고 해. 이번에는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커다란 범선을 하나 만들어 볼 참이야.

Posted by 꾸비스또 :